대학사계

우리나라처럼 일등 좋아하는 사회도 드물 것이다. 올림픽 경기에서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딴 선수가 시무룩해하는 모습은 흔한 광경이다. 금메달이 아니면 메달이 아니라 여기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면 그 자체로 아름답다’ 라거나 ‘지고도 이긴 것이다’ 식의 표현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우선시하는 우리의 집단 감성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2등을 하고도 서러운 판인데 꼴찌를 하면서 웃고 나다니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이처럼 ‘일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할 리 없다. 어차피 일등은 한 명일 테니까.

우리 사회에서 일등지상주의 사고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 대학이다. 고등학교까지는 어느 정도 평준화가 정착됐지만 대학으로 가면 일류대와 이류대, 그리고 그 다음 식으로 선이 갈린다. 물론 이런저런 이유로 대학 간에 평균적인 수준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비슷한 수준의 대학들 간에는 한 곳이 다른 곳을 일방적으로 압도하기 어렵다. 학교마다 자원을 집중하는 핵심 분야가 있기 때문이다. 같은 분야라도 교수, 학생, 사회 평판 등 보는 기준에 따라 순위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를 쓰고 도매금으로 대학 순위를 매기려 든다. 그러다 보니 소위 일류가 아닌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뭔가 찜찜한 열등감을 지닐 수밖에 없다. 심지어 월등히 우수한 교수진과 평판을 지닌 전공인데도 세속의 학교 서열 덕분에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경우도 있다. 대학에 들어와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입시 전선에 뛰어드는 학생들이 유난히 많은 데에는 이런 비합리적 사회 분위기가 한몫을 한다.

하지만 한국의 대학 랭킹은 올림픽 메달 색깔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엉터리 잣대다. 금메달, 은메달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들 몫이다. 메달 색깔이 다소 간의 실력 차이를 나타낼 수 있겠지만 메달 자체가 이미 실력의 인증서가 된다. 그래서 다른 나라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종류에 관계없이 기뻐한다. 우리 선수들도 속마음은 다를 바 없을 텐데 오로지 일등만 알아주는 못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자랑스러운 성과를 내고도 상처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대학은 어떠한가. 그나마 낫다고 하는 국내 대학들도 세계 기준으로 볼 때는 잘해야 이류권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 대학은 다 나쁜 대학’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좀 더 나쁜 대학과, 덜 나쁜 대학이 있을 뿐이다. 그저 그런 선수들이 동네에 모여 자기가 금메달이니 은메달이니 따져봤자 별 볼 일 없다는 얘기다.

한국의 대학들이 왜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와 배경을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넉넉지 않은 재정, 도를 넘어선 정부 규제, 교수 집단의 무기력을 조장하는 폐쇄적인 교육 여건, 고시나 취업에 목을 매게 하는 사회 환경, 교육을 사기업으로 간주하는 재단 소유주 등 누구나 다 아는 얘기들이다. 그렇다면 집합적으로 대학교육의 질을 높이는데 우리 사회의 에너지를 집중해야지, 그저 그런 이류들끼리 순위 가리는 일에 왜 그리 열을 올리는지 난 도대체 이해를 할 수 없다. 올림픽에 다녀와 나는 39등인데 너는 45등이니 내가 더 우월하다고 뽐내는 놈이 있다면 누구나 한 대 패 주고 싶을 것이다

그저 어쩔 수 없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학생들은 그다지 믿을만한 실력의 척도도 아닌 수능과 내신 점수에 근거해 차례차례 한국형 순위에 따라 대학 정원을 채운다. 그런데 그래 봤자 어차피 다 나쁜 대학들이다. 한 학기에 무려 6~7과목씩, 변변한 강의조교 도움 없이 고등학교 식 강의를 들어봤자 그런 공부가 세계 무대에서 돋보일 진짜 실력으로 이어질 리 없다. 좀 더 부지런하고 요령이 좋을수록 학점은 높아지겠지만 한 과목씩 들을 때마다 공부 같은 공부를 해봤다는 생각을 하는 학생이 얼마나 될까. 교수가 아무리 유능하고 학생이 아무리 열심히 하려 해도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알찬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 수강 신청을 못해 원하는 교수에게 강의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나마 억지로 한 자리를 차지했다 해도 대형 강의실 한구석에 앉아 강의에 집중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 말고도 교육 내용과 환경을 둘러싼 학생들의 불만은 강의실마다 넘쳐난다. 이러니 많은 학생들이 학교 강의는 학점 위주로 듣고, 제 살길을 찾아 고시나 취업에 매달리는 것이다. 

내가 ‘한국 대학은 다 나쁜 대학’이라 말하는 것은 결코 우리 대학들을 일방적으로 폄하하거나, 그곳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학생들을 실망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다. 꾸준한 투자와 노력으로 몇몇 분야의 경우 세계 수준에 근접해 가는 대학들도 없지 않다. 설사 세계 몇 위는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나 지역이 필요로 하는 인력을 배출하는 데 손색이 없는 교육을 제공하는 곳도 많다. 내가 이런 표현을 쓴 것은 2등에서 100등까지의 대학에 속한 이 땅의 무수한 젊은이들이 기죽지 않고 어깨를 펴고 다녔으면 하는 바람이 크기 때문이다. 못난 어른들이 강요하는 줄 세우기가 별 실속 없는 왜곡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어차피 세계 기준으로 ‘다 나쁜 대학’이라면 개인의 노력이 졸업 후의 차이를 만들 확률이 높다. 나 하기에 따라 우물 안 일류들을 쉽게 능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에게도 실력보다 간판이 먹히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고도성장의 길로 들어섰을 무렵에는 굴뚝 산업이라 불리는 전통 제조업이 경제구조의 주축이었다. 당시의 산업 현장에서 필요로 했던 인력은 기계 설명서를 이해할 수준의 기본적인 영어, 추가적 전문기술 교육을 따라갈 정도의 소양, 그리고 대규모 사업장에서 필요한 규율 정도만 갖추면 됐다. 그런데 웬만한 고등학교를 다녔으면 이런 조건은 대부분 충족시킬 수 있었다. 또한 대학 교육은 지금 수준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부실했다. 그런데 그게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대졸자가 많지 않아 어지간한 대학 졸업장 하나면 취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회사 일도 보통 직장에 들어간 다음에 배워서 하면 충분히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실력은 없어도 간판만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 시절의 못난 관행이 지금도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개인의 지적 능력이나 창의력이 경제의 핵심 동력이 되는 ‘지식기반 사회’이다. 지식의 양 못지않게 개성과 창의력을 강조하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대학 수준에서 받는 전문 교육의 중요성이 훨씬 커졌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 현장을 보면 여전히 대량생산 체제에 가깝다. 아무리 학교에서 정해준 대로 착실하게 교과과정을 따라간다 해도 현실에서 필요로 하는 실력을 제대로 기르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바깥 세상에서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사람을 채용하는데 결정적인 변수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대신 실력 그 자체가 말을 하게 된다. 세상이 정하는 명목상의 우리나라 대학 순위가 실질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기회라는 것이다. 열심히 부딪쳐 보라는 것이다. 실력보다는 간판이 앞섰던 옛날에는 이류가 일류를 극복하려면 실력 이상의 뭔가가 필요했다. 혈연, 지연, 학연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실력 하나만으로 충분히 내 자신을 일류로 만들 수 있다. 대다수의 다른 학생들이 평균의 함정에 빠진 채 ‘나쁜 교육’에 만족하고 있을 때 내가 좀 더 애쓰고 노력한다면 그 성과는 놀라울 수 있다. 학교 교육만으로 충분한 창의성을 기를 수 없다면,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보완할 수 있다.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 한발 앞서고, 내가 흘리는 땀이 한 방울 더 많다면 얼마든지 한판 승부가 가능하다. 대학은 나빠도 학생 개개인은 얼마든지 좋을 수 있는 것이다. 대학 간의 승부가 아니라 개인 간의 승부라면 굳이 한국에서의 랭킹에 마음 쓸 필요 없다. 기왕이면 세계 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인재가 되도록 스스로를 재촉해야 한다. 지식사회에서는 굴뚝 사회와 달리 국가 간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무엇을 이루지 못했다고 조급해할 필요 없다. 그것이 내가 속한 환경 탓이라고 자조하거나 변명하는 것은 옹졸한 일이다. 대신 나도 언젠가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를 격려하다 보면, 세상이 정해놓은 허상의 굴레는 더 이상 나를 힘들게 하는 변수가 되지 않는다. 한  번쯤은 나도 내가 원하는 분야에서 ‘일류’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뭐가 어려운가. 그 결실이 좀 늦게 온들 무슨 상관인가. 인생의 봄날은 나이 제한이 없는 법이다 (11.09.12).